fnctId=bbs,fnctNo=832 게시물 검색 제목 작성자 공통(상단고정) 공지 게시글 게시글 리스트 한반도 민주화와 민족의 통일 '장준하' 작성자 김유림 조회 1506 작성일 2017.09.27 ■ 장준하 (1918-1975) ▲장준하1918년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에서 태어난 장준하는 어린 시절을 독실한 기독교 장로였던 조부 장윤희 슬하에서 교육을 받으며 지냈고, 민족의식이 투철한 목사인 부친 장석인의 영향을 받았다. 1941년 일본 토요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가 다음 해에 도쿄신학교로 전학하였다. 이곳 대학의 2년 과정 예과에서 장준하는 나중에 한신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게 되는 문익환, 문동환, 전경연, 박봉랑 등을 만난다. 특히 박봉랑은 후일 장준하가 창간한 『사상계』의 주요 필자가 된다. 문익환은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까지 장준하와 같은 대열에서 민주화 운동을 했는데 장준하의 사후, 스스로 ‘나는 장준하의 대타’라며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우 문동환은 장준하가 일본신학교에서 끝내지 못한 신학 공부를 한신대학교에서 마치도록 주선했다. 1948년 봄, 장준하는 한신대학교에 편입하여 만학에 열중한 끝에 6개월 만에 졸업장을 받는다. 타계 18년 뒤인 1993년 한신대학교에서 제정한 제1회 ‘한신상’을 수상했다. ▲ 박봉랑, 송창근, 장준하(왼쪽부터)일제 강점기에 교육 활동을 하던 장준하는 대학 재학 중에 일본군에 입대하여 1944년 1월 쓰카다 부대에 배치됐으나 그해 7월에 탈출하여중국 중앙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후 중국 중앙군 준위가 되었고 1945년1945년 2월부터는 한국광복군 장교로 복무한다. 그러던 중 미국 CIA의 전신인 OSS에서 활동하다가 1945년 11월 임정 제1진으로 귀국하여 이후 김구의 비서로 일했으며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서도 활동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제1공화국 서기관이 되었고, 1950년에는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 1952년에는 문교부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 서무과장, 사무국장 등을 지냈다.. 4.19혁명의 단초가 된 『사상계』를 창간하였으며, 1956년에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제2공화국 장면 내각에서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 의원,국토건설단 기획부장, 국토건설단장 등을 지냈다. 5?16 쿠데타 이후 한일회담 반대, 베트남전쟁 파병 반대 운동에 가담했고, 6대 대선 윤보선 후보 지지 유세에서 박정희의 친일파, 남로당 경력을 문제 삼았다가 국가 원수 모독죄로 옥고를 치렀다. 7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투옥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가 같은 해 12월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1975년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는 거사를 준비하던 중, 그해 8월 17일에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에서 의문의 최후를 맞았다. 당시 유신정권은 실족사로 발표했으나, 사건 직후부터 정권에 의한 타살 의혹이 끊임없이제기되었고 그의 의문사를 규명하기 위한 노력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 60주년 기념관 앞 장준하 흉상 [출처] - 以小成大 이소성대 (2015) p 43~45에서 ※ 사단법인 장준하 기념사업회→ http://www.peacewave.or.kr/html2007/main.htm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에 투신한 '늦봄 문익환' 작성자 김유림 조회 1256 작성일 2017.09.26 ■ 늦봄 문익환 (1918-1994) ▲늦봄 문익환만주 북간도 명동 출생. 전시에 도쿄신학교를 중퇴하고 조선신학교로 전입학하여 졸업한 늦봄은 1956년부터 1970년까지 한국신학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구약신학을 가르쳤다. 늦봄은 목사이자 통일운동가, 사회운동가이며 시인이었다. 친구이자 사회운동가인 장준하의 의문사를 계기로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그는 1970년대~1980년대 국민들을 군대의 힘으로 억압하는 군부독재정권에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는 등 여러 차례 저항하여 수차례 투옥되었다. 1989년 통일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는 당시 진보 기독교인들의 인식에 따라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고 귀국하였으나, 정부와 사전 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방북했으며 평양 도착성명에서‘존경하는 김일성 주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한국 정부를 일방적으로 비방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잠입죄’로 투옥되어 1993년석방되었다. 이후, 활발한 통일운동과 강연활동을 벌이던 중, 1994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늦봄 문익환 부조 - 늦봄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이건 진담이라고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가기로 결심했다구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모란봉에 올라 대동강 흐르는 물에가슴 적실 생각을 해보라고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풀어버리는 거지얼어붙었던 마음 풀어버리는 거지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동무라고 부르면서 열살 스무살 때로돌아가는 거지 ▲ 늦봄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의 시 구절이 조각으로 제작되어 있다. [출처] - 以小成大 이소성대 (2015) p35~39에서 좁은 길을 걸어간 불굴의 개혁자 '장공 김재준' 작성자 김유림 조회 1210 작성일 2017.09.21 ■ 장공(長空) 김재준 (1901-1987) ▲장공 김재준장공 김재준의 이름이 한국 교회에 알려진 것은 1935년 ‘아빙돈 단권 성경주석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장공으로 하여금 한국 교회의 현실을 깊이 자각하게 하며 또한 그에게 새로운 시대의 사명을 불러일으켰다. 한국 교회의 교리적 근본주의의 신학 풍토와 율법주의적 형식주의 그리고 성장한 한국 교회를 지배하는 보수적 교권주의 세력 가운데서 그는 한국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는 신학 교육의 갱신과 더불어 새로운 교육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또한 1940년 조선신학교 개교에 장공이 참여한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거나 일시적인 적이 아니었다. 1930년대 국내 민족운동의 한 줄기인 민족 계몽운동을 통한 독립준비론의 한 형태로서 장공이 견지해 온 민족 주체적 신학 교육을 실험해 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너무도 높았다. 한국장로교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서북 교권 세력의 완강한 거부와 일제의 강력한 통제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장공은 경기도지사로부터 사설학원 인가를 받아 어려운 재정 속에서 조선신학원의 신학 교육을 지속해 나갔다. 1943년에 일제가 조선혁신교단의 조직을 강요하여 한국 교회의 주체성을 소멸하려 할 때도 장공은 홀로 학교를 지키며 구약 성서의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을 학생들에게가르쳤다. 일본 경찰은 구약이 유대민족의 세계 정복 야심을 표출시킨 책이므로 신학교에서 가르치지 못하게 궤변을 토하곤 했다. 일제의 감시와 통제, 교권 세력들의 비난과 공격에도 조선신학교 문을 닫지 않고 해방을 맞이한 것은 가히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장공의 메모 | 현재 장공기념관 2층에 장공의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장공 김재준 부조와 낡은성경그동안 조선신학원은 폭풍의 경랑 속에서 한 잎 낙엽같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도 침몰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가 같이하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해방될 때까지 삼 회에 걸쳐 졸업생을 냈다.- 김재준 전집 13권 그러나 6.25전쟁 중에도 장로교단의 신학 논쟁과 조선신학교 문제로 인한 교단 분규는 더 심각해져 갔다. 대구에 보수 계열이 신학교를 세웠고 1949년 4월 제35회 총회에서 그 학교를 직영신학교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 학교와 조선신학교의 합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되지 못하자 1951년 5월 제36회 총회에서는 두 신학교의 직영을 모두 취소하고 장공의 목사직 제명 처분을 내렸다. 총회 직영을 취소당한 조선신학교는 신학생을 양성하더라도 총회가 교역자 시험을 치르는 규정 아래서는 목사직으로 나가기 어렵게 되었다. 조선신학교 측의 태도는 날로 강경해져 갔다. 총회의 불법성을 규탄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총회 보수파들은 수적으로 더 강화하여 장공의 목사직 제명 처분을 장공의소속 노회인 경기노회에 지시를 절대 다수표로 결정하고 경기노회에 하달했다. 그리고 조선신학교 출신은 앞으로 장로교회의 목사가 될 수 없다는결의까지 통과시켰다. 경기노회는 총회의 월권행위에 반발하였다. 경기노회가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지만 차기 총회가 그것을 무시하고 장공의 제명 처분을 확정하려고 했다. 장로회총회의 신학교 결의 문제에 반대하는 운동인 ‘호헌위원회’가1952년 6월 대구에서 조직되고 이를 계기로 한국신학대학(1951년 4월 교명변경) 측 인사들이 총회헌법의 수호를 기치로 하여 전국적인 호헌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구 서문당교회에서 열린 제38회 총회에서 한국장로교회 역사상 전례 없는 교권이 발동되었다. 경기노회장이 총회에 제출한장공의 파면결의 시정 건은 불문에 붙여지고, 즉석에서 장공의 목사직 파면과 그 직분을 주의 이름과 직권으로 금한다고 선언하고, 한국신학대학 졸업생의 교역자 자격취소결의에 대한 노회들의 항의도 이전 총회의 결의의 재확인으로 끝나버렸다. 그 후 제38회 총회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총회의 법통 또는 정통성을 이어받는 호헌총회 즉 제38회 총회의 정식 개회를 모색하고, 소집위원 대표 김세열 목사 외 5인이 각 노회에 소집통고를 발송했다. 이 소집 과정에서 경향 각지의 노회들은 각각 분열의 아픔을 겪었다. 1953년 6월 동자동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분립된 9개 노회들로부터 47명의 대표들이 회동하여 총회를 정식으로 개회하였다. 교단과 총회 명칭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8회 총회’라고 정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신학적, 신앙적, 교회학적 갱신과약진을 표방한 역사적 성명서를 발표하여 국내외에 밝혔다. 1954년 6월 한국신학대학 측의 새 총회가 소집되었을 때, 새로운 기치와 목적에 부합하는교회와 선교를 지향하는 새 총회가 구 총회와 교단과 혼동되지 않기 위하여 교단 명칭을 ‘대한기독교장로회’로 개칭하였다. 장공은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정치를 잘 알았다면 보수적 교권주의자들과의 관계에서도, 일본 정부 당국과의 관계에서도,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그렇게 어렵고 힘들게 신학 교육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장공의 제3의 길로서의 ‘좁은 길’이 있었던 것이다. 1952년 교권주의자들로부터 총회의 불법 결의로 교수의 권위를 짓밟히고 교회 밖으로 쫓겨났고,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 세력으로부터 은퇴란 이름으로 강제로 가르침의 자유를 빼앗기고 학교 밖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불법과 불의에 굴복하지 않았다. 정의의 승리를 믿기에 그는 걸어온 삶의 방향과 괘도를 변경하지 않고 일관되게 저항적 삶을 살았다. 1960년 4.19혁명을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으로 본 장공은 한국 민족사의 과제를 선교적 과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득권 세력에 아부해 온 몰역사적인 한국 교회에 비판적 발언을 했다. 이런 역사와 신앙을 자각한 그의 영향력 하에 교육을 받은 기장 교회의 교역자들은 1960년 이후 반독재 민주화와 새 역사 참여에 당당히 앞장서는 개혁자들이 되었다. ▲임마누엘 | 이사야 7장 14절. 장공의 글씨를 박근원 명예교수가 뽑아다듬어 제작한 석판 ▲장공이 입던 두루마기 | 보관함 유리에 비친 것은 지금의 수유리 캠퍼스 풍경이다. [출처] - 以小成大 이소성대 (2015) p35~39에서 ※ 사단법인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 http://www.changgong.or.kr/ 신학 교육을 통한 한국 교회 개혁 운동의 선구자 '송암 함태영' 작성자 김유림 조회 1351 작성일 2017.09.20 ■ 송암(松巖) 함태영 (1873-1964) ▲송암 함태영송암은 “전면에 나서지 않는” 성품과 스스로 한 일에 대해 자랑하지 않는 겸손을 갖춘 이였다. 송암의 글에는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고백이 수없이 반복된다. 그러나 그는 법조인, 목회자, 교회행정가, 정치지도자로 살았으며 3.1운동의 실질적 주역으로 일제하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기독교 민족운동사에도 큰 기여를 했다. 관서 지방의 기독교 운동세력을 이끈 이승훈과 기호 지방의 민족운동을 이끈 송암의 만남이 교파를 넘어서 한국 교회 민족운동 세력을 하나 되게 하고 천도교와의 연대를 이끌어 냈다.3.1운동 이후 한국 교회는 민족사회를 이끌어 갈 지도력과 역동성을 상실하고 교권화, 보수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진보적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교회개혁운동을 위해 적극신앙단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장로회 총회는 ‘장로교회신경’에 위배된다며 송암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면직하고자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서북교권으로부터의 탈퇴를 선언하고 주체적인 한국 교회를 지향한 경중노회로 분립하였다. 그런데 이 분립이 또 다른 교회 분열의 고통을 가져올 수 있겠다고 생각한 송암은 화합의 길로 돌아섰다. 그 대신 송암은 한국 교회 개혁의 장기적인 대안으로 “조선인에 의한 세계적인 교역자 양성”을 목표로 하는 신학교 설립을 제시했다. 송암은 뜻을 같이 하는 승동교회의 김대현 장로를 통해 설립기부금을 기부 받아 조선신학원을 개원하였다. 1943년 조선신학원 원장, 1952년 한국신학대학장, 1958년 한국신학대학이 이사장 등 학사와 재정운영에 중책을 맡으며 신학교육을 통한 한국 교회의 개혁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수행했다. ▲1957 정초식 | 왼쪽 김재준부터 맨 앞줄에 미스 로즈, 조선출, 최윤관, 함태영, 김영철, 박용희 등이 서 있다. 머릿돌에는 송암 함태영이 뽑아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글이 새겨져 있다. 匠人所棄之石 成爲屋角之首石. 집 짓는 자의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마 21:42) 1958년 3월 수유리의 새 캠퍼스에서 개강을 했다. 동자동 캠퍼스는 협소하고 시설이 빈약했기 때문에 더 넓은 교지를 물색하여 새로운 캠퍼스를 건설할 것을 결의한 것이 서울 수복 직후 1954년 3월이다. 최종으로 정한 곳이 수유리 산 129번지. 이 교지를 확보하는 데 송암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총 10여만 평의 교지에 본관과 기숙사, 중요 시설이 들어서게 되고 한신의 수유리 시절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수유리 새 캠퍼스에 이주했을 때 가까운 곳에 교회당이 없었다. 대강의실을 예배실 삼아 쓰다가 1960년 4월부터 서울노회에 수유교회로 정식 등록하고 캠퍼스에 교회를 조직하였는데, 학교 구내의 교회는 위치가 전도에 불리하여 별도의 예배당의 필요성을 통감하게 되었다. 1964년 7월 수유교회당을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해 10월 송암이 별세하며 송암을 기리는 기념사업관 건립 후원회가 조직되어 캠퍼스 진입구 가까운 교지에 단층 건물을 짓게 되었다. 수유교회가 그곳을 예배 장소로 삼았다. 후일 송암기념관이 개축될 때 수유교회가 투자하여 교회당으로 사용하다가 수유교회는 송암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송암기념관이 송암교회의 소유로 넘어가면서 그 건물이 선 교지는 송암교회로 이전되었다. ▲ 현재 캠퍼스의 잔디 언덕기슭에 놓여 있는 옛 머릿돌 ▲1975년 개축된 송암기념관 ▲ 현재 송암교회 [출처] - 以小成大 이소성대 (2015) p30~31에서 나라의 독립과 민족 교회를 위해 힘쓴 '만우 송창근' 작성자 김유림 조회 1339 작성일 2017.09.12 ■ 만우 송창근 (1898-1950) ▲만우 송창근"내가 죽거든 나를 학교 정문에 묻어다오. 나를 밟고 후배들이 더욱 커가도록!" ▲ 만우관 앞 개교 50주년 기념 석판 위의 말은 해방 후 세계 교회의 에큐메니칼 협력을 받아 신학 교육의 자립화를 추진하기 위해 외국을 순방하던 도중 죽음 직전까지 가는 고혈압 증세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난 만우의 말이다. 만우는 6.25전쟁 와중에 피난을 거부하고 끝까지 동자동 학교(현 서울 성남교회)를 지키다 납북되어 생을 마감하였다. “너는 목사가 되어 민족을 계몽하라”는 존경하는 스승 이동휘의 말 한 마디에 독립군이 되겠다는 계획을 포기하고 목회자의 길을 가기위해 신학교에 입학한 만우. 함태영에게 목회 수업을 받고 그 밑에서 전도사 일을 하며 만우는 한국 교회가 민족 주체적인 교회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을 자각했다. 무일푼으로 떠났던 미국 유학 중에 그는 온갖 힘겨운 밑바닥 노동을 하며 공부하여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가난과 억압속에 있는 식민지 조국으로 돌아왔다. 맡았던 평양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 직을 사임하고 1936년에 만우는 아무 것도 준비된 것 없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곳에 성빈학사를 세우고 지역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제 사업을 펼쳤다. 그는 도움 받는 이가의존적인 타성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신앙 인격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가진 자들이 그들이 가진 것을 선한 일에 기쁘게 쓸 수 있도록 움직이게 하는 영적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신학원은 1945년에 조선신학교로 교명을 하고 학교 인가를 받는다. 이후 조선신학교는 정규대학 인가를 받아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하려고 했는데, 여기에는 대학 유지 재단의 형성이 급선무였다. 이에 만우는 거제도 옥포의 진정률 장로로부터 그의 문중소유인 임야 45만평을 희사 받아 재단 형성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만우는 우정을 위해 명예나 권력을 포기하고 비난을 감수하는 이였다. 설립된 조선신학교의 학장으로 장공을 먼저 추대한 이가 그였고, 한국 교회가 이용도 목사를 신비주의자로 몰아 이단으로 정죄하였을 때도 만우만은 친구인 그를 믿었다. 그러나 그의 우정의 요소는 ‘정의’였다. “내친구라서 다 옳은 것이 아니다. 옳으니까 내 친구다!” 만우가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장공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만우는 장공에게 감춰진 무한한 가능성과 재능을 보고 일깨워주었다. 또한 장공이 민족사와 그리스도 복음에 눈을 뜨게 하였다.▲ 만우 송창근 부조만우가 한국 교회에 남긴 것은 ‘교회의 보화는 가난’이라는 성 프란시스의 성빈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실천을 통해 길러낸 제자들이다. 만우에게 제자는 단순한 교육적 대상이 아니고 함께 이루어가는 교육의 주체였다. 그리고 그 교육의 주제는 예수 정신을 어떻게 삶으로 실천하느냐는 것이었다. 만우의 또 다른 교육의 특징은 과거의 것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것과 변화를 과감히 받아들이는 데 있었다. 새로운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인 복음일 뿐으로 이것을 지키는 데는 그만큼 보수적인 이가 없었으나 그 외의 것에서는 그만큼 진보적인 이가 없었다. 만우는 좌우명처럼 “문이 없으면 벽을 밀어 문을 만들라”고 학생들에게 얘기하곤 했다. 어느곳에 가든지 창조적인 도전 의식을 가지고 내가 있는 곳을 이전보다 더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하나님에게 부여받은 소명이요, 책임이라는 뜻이었다. 만우의 가르침을 받아 작은 목회를 하면서도 한평생 변함없는 열정으로 가난하고 배고픈 이들에게 나누고 베푸는 일에 헌신하였던 김삼수, 전학석 목사가 만우의 분신들이었다. ▲ 만우 송창근 박사의 호를 따서 지어진 만우관 건물 [출처] - 以小成大 이소성대 (2015) p28~29에서 한신대학교의 전신 '조선신학원'이 설립되다. '노석 김대현, 강 작성자 김유림 조회 1777 작성일 2017.09.11 ▲1939 조선신학원 설립기성회 실행위원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인하여 1938년 평양장로회신학교가 폐교되었다. 1939년 초 함태영, 송창근 등 여러 교역자들이 서울에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할 필요성을 인정하고 각지의 장로회 교회지도자들의 호응을 얻어 ‘장로 회신학교 설립기성회 실행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전적으로 민족 자본을 바탕으로 학교를 세우고 한국 교회가 주체적이고 자주적으로 세계적인 목회자를 양성할 수 있는 교육기관 설립을 목표로 했으며, 세계 교회와 교류하고 연대하는 에큐메니칼 신학 노선을 지향했다. 뜻을 같이 한 김대현 장로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바치려고 모은 거액의 헌금을 내놓아 학교재단 형성이 가능해졌으나 학교 설립의 길은 험난했다. 장로회 교단 총회로부터 목회자 양성기관 직영 신학교라는 인가를 받지 못한 것이다. 평양신학교 폐쇄는 신사참배를 반대한 일종의 강력한 시위 행위와 같은 것인데 다시 신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명분이 없다는 이유와 전쟁과 박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손을 떼고 귀국한 외래 선교사들에 대한 배신 행위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비법적으로 통과시킨 장로회 총회의 결정 자체가 명분이 없는 것이었고, 주체적으로 신학교를 경영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견해가 생각 있는 지도자들 사이에 이미 잠재해 있었다. 그러나 총독부에 제출한 신학교 설립 인가 신청서는 기각되었고 1939년 장로회 총회는 조선신학교를 직영 신학교가 아닌 신학교로 인준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조선신학교는 조선신학원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노석 김대현의 조선신학원 개원사하나님께서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를 돌봐주신다는 말씀을 나는 내 경험에서 체득하고 있습니다. 나는 조선신학교란 간판으로 처음부터 크게 벌리는 데 두려움을 느껴왔는데 이제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으므로 이렇게 초라하게 작은 기관으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나무 자라듯 오래오래 더디 자라는 생명일수록 더 견실한 법입니다. 나는 원래 이소성대(以小成大)를 원했습니다. 이제 이 작은 조선신학원이 꾸준히 자라 전 조선뿐 아니라 전 세계에 유명한 신학교로 결실할 것을 확신합니다. 작은 데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장래는 더욱 견실할 것입니다. 이어져 온 한신 사랑 ■ 노석 김대현 (1876~1940)▲노석 김대현1930년대 한국 교회는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방향성을 잃고 있었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종교 탄압에 대항하는 민족적이고 주체적인 선교정책과 노선을 갖지 못하고 친일적 행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민중의어려운 현실을 외면하고 파벌 싸움에 빠져 보수 교권화, 율법화되고 있었다. 이때 노석은 민족이 살려면 교회가 살아야 하고 교회가 살려면 교역자가 살아야한다고 생각하고 학국 교회를 위한 새로운 교역자 양성의 중요성을 자각했다.금필헌(金必獻). 필히 하나님께 바치기 위한 돈. 노석은 자신의 모든 것, 즉 소유나 시간, 재능 그리고 생명까지라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므로 모든 것을 주인에게 반드시 돌려 드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석의 금필헌 신앙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그는 작은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것으로 생각하고 소홀히 하거나 낭비하지 않았던 반면, 큰 것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1922년 6월 노석은 백정(白丁) 교회로 이름난 승동교회로 신앙의적을 옮겨 이곳의 우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교회를 돕고,나라 독립의 선결 조건으로서 민족 자본 형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1930년대 승동교회에서 빚어진 한국 교회 안 파벌과 윤리적 부패를 목격하고는 이에 고민하며 엎드려 기도하던 노석은 한국 교회 개혁을 꿈꾸고 있는 젊은 목회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았다. 권위와 지위를 다 버리고 북간도 용정촌에서 민중과 함께하고 있는 장공 김재준과 대형 교회인 산정현교회의 직을 사임하고 부산에서 성빈학사(聖貧學舍)를 세워 헐벗고 병든 가난한 이들의 구제 사업을 하는 만우 송창근에게서 노석은 새 시대 목회자의 상과 미래 그리고 한국 교회의 이상을 보았다. 그는 일찍부터 이들을 비롯한 한국 교회의 진보적인 목회자들을 눈여겨보고 그들과 함께 조선신학원 설립을 추진한 것이다. ■ 강제(岡齊) 김영철(1898-1985) 조선신학원이 개원한 지 5개월이 안 되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버지의 뒤를 따라 강제는 조선신학원의 기초를 다진다. 초창기 조선신학원은 한국교회의 보수적 근본주의자들로부터는 친일 학교로 매도당했고, 일제로부터는 그들의 교육 시책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는 반일적 민족 학교로 탄압받았다. 특히 일제는 조선신학원을 후원한 강제에게 신변상의 위협과 사업상의 여러 제재를 통해 불이익을 주었다. 그러나 강제는 물심양면으로 조선신학원의 교육과 발전에 혁혁한 기여를 하였다. 그 또한 노석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위해서는 1원도 쓰기를 아까워하면서도 하나님의 사업에는 아낌없이 전부를 바치는 이였다.의사였던 그는 하나님께 드리는 돈이 거룩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헌금의 자세 못지않게 모으는 방법도 정당해야 한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었다. 다른 병원보다 치료비를 적게 받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았다. 그의 생전에는 밝혀지지 않았던 사항들이 있는데, 독립운동가로서의 행적이 그것이다. 3.1운동에 가담하고, 대한독립애국단과 조선민족대동단의 단원으로 활동한 그는 그러나 진정 민족을 독립시키고 역사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은 오직 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파하고 교육 사업을 통한 인재 양성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는 1937년 사재를 출연하여 성북구 보문동에 신암교회를 설립하고 오늘날 성신여자대학교로 발전한 성신여학교의 설립이사로 활동하였다.강제는 한평생 의사로서 많은 돈을 벌었지만 자신의 소유로 쌓아놓지 않고 하나님의 일에 모두 드렸다. 또한 의학과 의술을 병들고 헐벗은 민중들을 위해 봉사하는 하나님의 은사로 여겨 전라도 고창, 충청도 청주,경북 영일 등 의료혜택을 받기 어려운 지역에 병원을 개원하여 인술을 베풀었다. ■ 백석(白石) 김영환(1905-1970)노석과 강제의 뒤에서 드러나지 않게 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몸을 바쳐 헌신한 이가 백석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드러내지 않고 뜨거운 사랑의 열정과 순수한 헌신으로 남몰래 베풀었던 그의 신앙의 정점은 1940년 설립한 조선신학교를 위한 수고와 봉사였다.백석은 일제로부터 노골적인 사업상의 제재와 불이익을 받았다. 항일민족운동 조직인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한 송창근 목사, 일본인 밑에서 입던 법복을 벗고 목사의 길에 들어선 함태영 목사, 불령선인들의 본거지로 지목되는 북간도 용정의 김재준 목사가 중심이 된 조선신학교가 일제의 눈에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실질적으로 학교를 지원하고 돕는 백석에게 그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힘겨운 일이었다. 또한 한국장로교회의 보수적 교권주의자들은 김재준을 비롯한 교수진과 신학교에 공격과 비난을 퍼부었다. 조선신학교가 친일적 학교라며, 당시 혁신교단 사건과 연루시켜 신학교의 근본이념과 목표를 매도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고 조선신학교를 꿋꿋이 지켜나갔다.그리고 백석은 장공의 생애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장공이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현실 앞에서 순수한 학자로서 여린 시인의 가슴을 안고 속앓이를 할 때 백석은 사업가로서의 폭넓은 융통성과 지사의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장공의 속풀이를 해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제 노석과 강제, 백석은 모두 하늘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갔다. 그러나 국내외에서 훌륭히 성장한 그들의 후손들이 선대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강제장학회를 출범, 백석장학금 전달 등 뜻 깊은 장학기금을 출연하고 수유리 캠퍼스 발전을 위해 거액의 건축 기금을 약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할아버지 김대현 장로로부터 시작된 금필헌 신앙이 김영철, 김영환 장로를 거쳐 오늘날 3대째로 계승되고 있다. 이것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귀한 열매요, 아름다운 믿음의 유산인 것이다.“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 12:33)▲노석 공원노석 김대환 장로, 강제 김영철 장로, 백석 김영환 장로의 한신 사랑의 뜻을 기리려는 김준수 장로의 헌금으로 2019년 5월 서울캠퍼스 백석기념관 뒤편에 소박하지만 아름답게 조성되었다.[출처] - 以小成大 이소성대(2015) p22~27에서 처음 1 끝 담당부서 : 브랜드홍보팀 전화번호 : 031-379-0036~37